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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년전 북과의 EC-121 격추사건에 보복하지 않은 결과

by Viggen&Draken 2023. 7. 17.
2023-04-14 13:33:20

54년전 북과의 EC-121 격추사건에 보복하지 않은 결과

 

1969년 4월 15일, 북한은 미군 정찰 항공기 EC-121을 공격해 해상에 추락시켰다. 이 사건은 북-미 관계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탑승한 승무원 전원이 사망한 이 사건은 6·25 전쟁 이후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감행한 가장 공격적인 행위였다. 기록이 잘 되어있는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요소들이 불확실하다.1969년 4월15일 오후 3시 55분, 일본 Atsugi 주일미군의 미 해군항공기지에서 이륙한 해군 전자정찰기 EC-121가 북한 공군 근위 제 1항공사단 소속의 MiG-21 전투기에 의해 청진시 남동쪽 150km 동해상에서 격추됐다. 이로 인해 승무원 31명 전원이 사망했다.

Warning Star라는 닉네임을 가진 EC-121M BuNo 135749은 미 해군 제1항공정찰대대(VQ-1) 소속으로 National Security Agency (NSA) 작전의 일환으로 사고 당일 오전 7시에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군 및 북한 정찰 임무를 띠고 아츠기 미 해군기지에서 코드명 "Deep Sea 129"로 "Beggar Shadow"로 알려진 일상적인 정찰 임무 비행을 위해 이륙한 지 7시간 뒤 사고 해역에서 사라진다.이 정찰기는 Constellation의 ELINT 버전인 Lockheed EC-121M Warning Star로 이러한 유형의 임무를 위해 평소와 같이 31명의 승무원이 탑승했다.EC-121M의 동체 측면, 상부 및 하부에는 디양한 형태의 ELINT 안테나가 장착되어 있는 특별한 모습을 가졌다. 각 안테나는 다른 유형의 적 레이더, 통신 시스템 또는 기타 전자 신호 장비를 탐지하여 기록한다.1968년 푸에블로 함 피랍사건 이후 자신감을 가진 북한은 정기적으로 북한 영공에 접근해 정보를 수집해 가는 미 해군 정찰기 EC-121을 격추하는 대담한 작전을 계획했다. EC-121은 프로펠러 비행기로 속도는 느리지만 당시로서는 최고 성능의 레이더와 전자 장비를 갖추었기 때문에 이를 활용해서 북한 전투기가 뜨면 먼저 발견하고 멀리 달아나곤 했다.

일본 아츠기 해군기지에서 발진한 EC-121기는 동해를 통해 소련 해군 태평양 함대와 소련 공군의 극동 공군이 포진한 블라디보스토크를 정찰하고 이어 북한 쪽을 훑으며 남쪽으로 내려오곤 했다. 평소와 같이 해안선에서 50nm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1969년 1월 1일 이후 200회 이상의 유사한 사한 "Beggar Shadow"임무가 수행됐는데 이는 하루 평균 2건 이상 진행된 것이다. 임무는 너무 평범해서 "낮은 위험"으로 분류됐었다. 이 정찰기를 노린 것은 북한 공군의 김책공군대학 학장 김기옥 소장이었다.어랑비행장은 김책공군대학이 관할하는 공항으로, 이 곳에는 속도가 느린 MiG-15기밖에 없었기때문에 김기옥은 평남 북창비행장에 주둔한 22연대의 MiG-21기 두 대를 어랑비행장으로 이동시키는데, MiG-21이 자력으로 어랑비행장으로 날아오면 미 해군 정찰장비가 그 사실을 포착하고 경계하게 되므로, MiG-21기를 분해해 야간 열차에 싣고 비밀리에 어랑비행장으로 옮겼다. 그리고 어랑비행장에 대형 텐트를 쳐 미군 정찰장비의 첩보를 차단한 후, MiG-21기를 재조립했다. 그리고는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을 기약하며 1주일 남짓 EC-121이 날아오기를 기다렸다.1969년 4월 15일 북한 공군 레이더는 EC-121이 예상한 항로로 날아온 것을 포착했다. 김기옥은 즉시 두 대의 MiG-21기를 이륙시켜 바다에 바짝 붙어 날아가는 초저공 비행으로 EC-121의 예상 진행 항로 쪽으로 날아가게 했다. 임무 수행 6시간 30분, 정확히 현지 시간으로 오후 12시 37분에 정찰기는 70해리 이격된 동해상에서 북한 해안선을 따라 비행중 탑승한 통신정보병들은 북한 통신이 증가하는 것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EC-121M에는 공중 표적을 추적할 수 있는 자체 전술 레이더가 없었기 때문에 정찰기의 임무 승무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증가하는 무선 통신의 빈도와 긴급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뿐이었다. 이 승무원들 대부분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러시아어, 한국어, 중국어를 할 수 있었고 그들이 청취한 통신을 통해 북괴 관제사이 정찰기를 향해 요격기를 유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요격기 위치를 알지 못했다. 주한 미육군이 육상에 설치된 레이더를 이용하여 요격기를 추적하던 중 초저공으로 바다에 붙어 EC-121 진행 항로로 접근하던 북괴 공군 MiG 전투기가 갑자기 치솟아 올라 EC-121M앞에 갑자기 등장하자 경고신호를 보냈고 거의 즉시 Beggar Shadow 임무를 지원하고 있던 NAS Atsugi의 VQ-1 통신 팀은 World Wide Military Command and Control System 네트워크에서 경고를 확인했다. 그들은 EC-121M의 조종석에 있는 LCDR Overstreet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메시지는 즉시 임무를 중단하고 기지로 돌아가라는 “Condition Three Alert”였다. 또한 갑자기 접근한 북괴의 MiG 전투기가 정찰기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달했다.EC-121에 접근한 MiG-21 제1번기가 최근거리에서 열추적 미사일 K-13을 발사했고 이어 2번기도 K13을 발사하여, EC-121은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동해로 추락했다. 이로 인해 EC-121 승무원 31명은 전원 사망했다.

1969년 3월 CVW-9 항모전단을 탑재하고 항해중인 미 항모 USS Enterprise (CVAN-65) 

미국은 강경하게 대응하여, 항공모함 USS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하여 USS Ticonderoga (CV/CVA/CVS-14) , USS Ranger (CV/CVA-61) 및 USS Hornet (CV/CVA/CVS-12) 등 4척의 항모와 USS 뉴저지, 순양함 3척과 구축함 15척, 호위함 1척으로 구성된 71기동전대 (Task Force 71 (TF 71)를 동해에 배치하여 원산항 앞바다에서 무력시위에 나섰다. 판문점에서는 공산측의 요청으로 290차 군사정전위가 긴박하고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이 당시 닉슨 행정부는 전술 핵무기를 사용한 보복 공격을 검토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주일, 주한미군 부대에는 전술핵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핵보복을 비롯한 미국의 응징조치는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격추작전에 동원된 북한 공군 제 1 항공사단은 이 사건으로 '근위' 칭호를 수여받아 근위대로 승격되었으며, 1항공사단 소속 MiG-21 2대는 이 공로로 '415 전투기' 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되었다.미군은 추락 장소로 추정되는 해역을 수색하였고 격추 다음날인 16일 기체의 잔해를 발견하였으며, 17일에는 승무원 2명의 시신을 수습했다. 나머지 29명은 찾지 못하고 수색을 종료했다.총격 사건 이후 닉슨 백악관은 격분했다. 눈에 띄는 분노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restraint”의 문제라고 말하면서 완화된 반응을 보냈다. 미군은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으므로 보복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Beggar Shadow" ELINT 임무는 불과 며칠 후에 재개됐다. 공식적인 항의가 있었지만 분명히 북한 주민들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평양에서는 북한 주민들이 자랑스럽게 행사를 축하하고 있었다.궁극적으로 Beggar Shadow 임무 코드 명 "Deep Sea 129"의 격추는 북한의 승리였다. 그것은 또한 북한의 군국주의와 날것의 공격성이 예나 지금이나 길들여지지 않았으며 지도부가 예측할 수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격추는 세계 군사 지휘 및 통제 시스템의 분수령 이벤트이기도 했다. 또 다른 위기가 발생할 경우 더 나은 조정과 더 시기 적절한 경고가 필요했다. 비상 통신 시스템의 결함을 수정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됐다.

북괴가 EC-121 격추에 대해 무슨 근거를 갖고 행동했는 지는 불명확하며 현재도 이유를 알 수 없다.이해를 위해 북괴의 “승전론”(theory of victory)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북한이 적을 저지하거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거나, 그리고 위기 상황 확대를 제어하는 데에 있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을 대략적으로 정의하는 용어다. 미국을 상대하는데에 있어 북한의 '승전론'에 관해 김일성이 자주 반복했던 말로 북한은 “보복은 보복으로, 총력전은 총력전으로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EC-121 격추의 포괄적 목적은 푸에블로 호 납치사건과 비슷하다고 발언했다.“미국은 푸에블로 호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못 얻었다.” 푸에블로 호 납치는 근본적으로 정치적 목적을 가진 군사적 행위였다.“미국이 그때 싸우기로 결정했다면 우리도 싸웠을 것이다”고 말했다. 더나아가 “우리는 38선에서 미국과 거의 매일 총격전을(firefights) 한다. 그들이 쏘면 우리도 쏜다… 하지만 이로인해 특별한 분쟁이 일어나진 않았다”고 말했다.보복의 실패는 미래 공격을 낳는다는 이유를 배경으로 공격 당했을 때는 반사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신조를 북괴는 가진 것이다.EC-121 격추와 같은 작은 공격이 일반적으로 전쟁을 막는다고 말한 것은 소규모의 폭력 행위가 일반적으로 전쟁 억지력을 성립시킨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미국이 북괴에 보복하지 않는 ‘진짜’ 이유라는 것이다. 북괴에 의한 비슷한 도발들이 미국의 보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던 것과 같이 EC-121 격추 또한 그렇게 믿었다. 미국이 그전 해에 있었던 푸에블로 위기를 대처한 방법을 보고 보복을 꺼려한다는 추론을 끌어냈음을 알 수 있다.북한은 군사력이 정치적 가치를 갖고 있으며, 위기고조(escalation)이 위기진정(de-escalation)을 위한 수단이며 그리고 도발이 미국의 침략을 억제시킬 수 있고, 공격당했을 때는 보복하는 것이 신뢰성 있는 억지전략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이런 매우 공격적이고 평판을 중시하는 북한의‘승전론’에 주의하지 않으면 우발 전쟁을 야기할 수 있다.이렇게 끝을 맺은 이 글은 KBS가 2017년 4월 24일 "북한의 EC-121격추사건과 선제타격론"이란 외신 번역기사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용방송에 의한 북괴의 두둔에는 끝이 없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세뇌당해온 것이다.지금 필요한 것은 "미친 개에는 몽둥이가 약이다"라는 말이다. 우유부단했던 리처드 닉슨은 베트남전을 종결시켜 공산화를 이루도록 했고 닉슨 독트린덕분에 북괴의 도발에도 침묵했으며 오늘날의 중공이 있도록 주도했고 결국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삶은 대가리들로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